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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퍼즐 조각 _ 이대범 2008/09/01
흩어진 퍼즐 조각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어느 곳에나 있으며, 어느 곳에도 없는 ‘그/그들’

그가 그곳에 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왜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곳에 있으니 무심히 그에게 다가갈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혹시 그에게 다가가는 이 걸음이 쌓이고 쌓여 내가 그의 앞에 마주선다면 그가 누군지,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일단, 몇 걸음 옮기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자이며, 한복을 입고 있다. 차츰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수로서 ‘그’가 아니라 무한 복제된 복수로서 ‘그들’이다. 분명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으나, 그 옆에 그가, 그 옆에 또 그가 그리고 또 그가 무한하게 등장한다. 그를 알기 위해 다가갔지만, 정작 그는 ‘그들’ 속으로 숨어 버렸다. 나는 무수한 ‘그들’이 서로가 ‘그’라고 외치고 있는 아우성 속에서 그에게 다가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내가 그곳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곳에 없다는 그의 부재뿐이다. 이 부재는 그가 어느 곳에나 있으며,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성으로 향했던 최초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가 발생했다. 먼저 질문을 던질 대상, 즉 ‘그들’ 속에 숨어 있는 ‘그’를 찾아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생겨난다. 그는 어디로 그리고 어떻게 사라진 것인가? 방향 상실한 시선을 거두고 그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뒤를 돌아 반대편을 바라본다. 또 하나의 인물이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혼란에 빠진 그를 바라보고 있다. 곱게 양장을 입고 멋을 뽐내고 있는 그는 단수이다. 그의 주변에는 ‘그들’이 없다. 그는 수없이 많은 ‘그들’ 중 누구를 보고 있었을까? 혹시,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재의 논리

이번 전시는 두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인 노라 노(본명: 노명자, 1928~ )와 로더미어 자작부인(본명: 이정순, 1950~ )이 그들이다. 이들은 단지 개인적 삶을 영위한 어찌 보면, 평범한 인물이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그들의 본명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변화의 과정에 거대한 한국현대사의 파고가 담겨 있다. 한 개인으로서 삶이 한국현대사라는 그늘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두 여성을 ‘re-collection(재수집, 회상/회고/추억)’하는 기저로 작동하고 있기에 중요하다. 개인의 미시사와 역사의 거대서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거대서사의 담론 체계에서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미시사에 대한 주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미시사적인 개인의 기록을 제시하는 것 자체를 지향점으로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re-collection’된 두 여성의 개인사적인 이야기는 이번 전시를 독해하는데 있어서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나, 유념해 두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단지 이번 전시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두 여성의 미시사적인 연대기에 주목하다 보면, 이번 전시의 표면만을 보게 된다.

이번 전시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시선은 두 인물의 개인적 연대기에 방점을 두고 표피적으로 접근한다. 파란만장한 그들의 연대기가 중심이며 그 증거로 그들의 기억을 내포하고 있는 ‘사진(사실은 사진이 아닌)’이 각자의 방에 선택되어 놓여 있다. 그러기에 일견 두 개의 전시실은 두 인물의 각각의 자서전처럼 보인다. 간혹 그 증거들 틈새에서 그들이 겪었을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새어나오기는 하지만, 중심점은 여전히 일상적 개인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별적 방이 한 인물의 연대기를 차근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분명 한 인물에서 발생한 파편들이지만, 그것들은 완성된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기 보다는 분절적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기억의 파편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연대기이다. 이것들은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진다. 그러기에 실상 두 여성의 연대기는 완성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연되고 있다. 철저하게 두 여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파편들이지만 오히려 파편들은 두 여성을 거대한 한국현대사 담론 안에서 해체시킨다. 그들은 그곳에서 부재한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 인물들의 완성된 연대기가 아니라 그 인물을 파편으로 재현하는 방식 자체, 즉 ‘부재의 논리’이다.

지금까지 조덕현의 작업은 크게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사진을 정밀묘사를 통해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서 새로운 역사적 문맥에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대상이 언젠가 존재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그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발굴하여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의 작업에 부재가 상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건, 어떤 대상이건 ‘re-collection(회상/회고/추억: 이후에는 통칭하여 ‘기억’으로 사용)’ 한다는 것은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기억은 망각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둘의 커다란 차이점은 현실 개입 여부에 있다. 망각은 현재에 호출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즉 망각은 과거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반면, 기억은 과거의 순간에서 끊임없이 현재로 호출되고, 현실 문제에 개입한다. 어떤 사건(혹은 대상)이 ‘기억’이냐 망각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시간에서 그것들이 지니는 의미의 경중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적 시점이다. 현재 그것이 호출 가능한 것이냐, 아니냐가 그 대상이 망각 혹은 기억의 층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러기에 이 두 층위는 유보적이다. 현실 문제에 따라서 때로는 망각의 층위에, 때로는 기억의 층위에 놓인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두 여성)’이 재현되었는가 보다는 ‘어떻게(대칭, 순환, 발굴)’ 재현하고 있는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흩어진 퍼즐 조각 1 : 거울(대칭)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의 형식적 근간은 ‘거울(혹은 대칭)’이다. 인물들의 개별적 역사를 다루고 있는 파편들은 모두 거울을 마주하고 있듯이 대칭으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한 화면에서 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두 개의 캔버스에 분할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회화 작업뿐만 아니라 영상, 사진, 설치 등 이번 전시의 모든 작업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거울의 일반적 특징은 대상과 대상을 반사하는 표면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울 앞에 마주함으로써 인식 가능하다. 거울 앞에 마주하지 않는다면 거울은 침묵하고 있는 벽면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거울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유리창이 있다. 거울과 유리창은 마주한 대상을 자신들의 표면에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유리창은 표면 저 너머의 세계를 마주한 대상에게 허락하지만, 거울은 마주한 대상 이외의 것에는 닫혀 있다. 거울 표면은 마주한 대상만을 단지 대칭적으로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 표면에는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울의 세계가 거울 표면을 마주하고 있는 대상과 그 표면에 맺힌 상 자체로 완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의미론적 위상은 동일하지 않다.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원본과 재현이라는 의미상의 위상이 부여된다. 닮아 있지만, 거울에 표면의 상은 대상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거울의 세계에는 원본과 재현물이라는 위계 체계가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이러한 의미론적 위상을 거부한다.

이 지점은 전시 전체 디스플레이에서도 나타난다. 이번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가 거울의 대칭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마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동일 면 위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거울 앞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본/재현의 문제가 모호해진다. 과연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재현물인가?’ 이렇듯 동일한 면에 대칭된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답을 지연시킨다. 이들에게 고정된 지위가 없이 미끄러진다는 것은 상호 지위를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이 서로의 위상을 교환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시장 초입에 ‘그’를 ‘그들’로 전환시키는 방법과 유사하다. 분명 그곳에도 ‘그’는 존재한다. 그러나 거울의 세계에 놓이면서 ‘그’는 ‘그들’로 전환되고 그곳에는 ‘있으면서 없는’ 혹은 ‘없으면서 있는’ 세계가 제시된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는 관객의 문제이다. 대상은 거울의 세계에서 순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관객들은 대상과 거울 표면의 상을 하나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거울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덕현이 제시하고 있는 거울 표면에는 관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거울을 둘러봐도 관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시 자체가 거울구조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거울은 작품 하나하나에 작동하기도 하지만, 전시장 부분 또는 전시장 자체가 거울로 상정되어 있다. 거울과 거울이 관계를 맺으면서 전시장 자체가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심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은 이미 거울 세계에서 해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작품 자체도 해체되고 있으며, 그것을 찾고자 하는 관객도 해체되고 있는 전시 공간은 작품도, 관객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찾고 그것을 맞추는(때로는 숨고, 어긋나기도 하는) 한 판의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 장(場)이다.



흩어진 퍼즐 조각 2 : 순환

이번 전시에서 순환의 논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로더미어 자작부인의 작업이다. 2층 공간에는 서구인의 초상이 걸려 있다. ‘서구’에 집중해서 본다면 분명 낯선 사진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진 속 인물의 계층적 특성을 나타내는 귀족적 의상 역시 낯설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은 한국인으로서 먼 이국땅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로더미어 자작부인의 관점에서는 매우 친숙한 것이다. 그런데, 로더미어 자작부인은 친숙한 것을 버리고 역으로 낯선 것으로 회귀(回歸)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한국이라는 땅이 자신의 어머니가 묻힌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것은 흡사 <삶의 계보학-아버지에 대하여>전(국제갤러리, 1996)에서 아버지가 묻힌 땅에 자신의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을 묻고 발굴하는 것과 닮아 있다. 조덕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땅에 자신의 아들을 묻고 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계보학을, 그리고 가족의 계보학을,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보편적 삶의 계보학을 구축한다. 조덕현은 이러한 ‘땅(무덤)’의 상징성을 로더미어 자작부인의 어머니가 묻힌 땅에 그대로 적용한다. 굳이 따지고 들면, 로더미어 자작부인은 어머니가 묻힌 땅, 더 나아가 한국 땅과의 연은 미약하다. 그러나 그곳은 어머니가 묻힌 곳, 더 나아가 그 윗대가 묻힌 곳이다. 다시말해 그 곳은 로더미어 자작부인의 삶의 계보학이 이뤄지고 있는 장소이다. 어머니가 묻힌 장소이며,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묻힐 장소이며, 앞으로 자신이 묻힐 장소이다. 이러한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백련사와 연꽃(白蓮)의 관계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마치 사진처럼 보이는 영상 작업에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승려)이 있다. 푸른 풍경에 묻혀 사람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영상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배경은 대칭되어 있고 영상에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시선은 작지만 미세한 사람의 움직임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의 움직임이다. 그는 대칭된 풍경 사이를 이동하면 끊임없이 땅에 무언가를 묻고 발굴한다. 그것은 바로 오래 동안 묻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연꽃이다. 과거 시간에 놓여 있는 것을 영상에 담아내고 실물은 전시장에 놓인다. 그것도 무수히 반복되는 모습으로 말이다.

백련사의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은 백련사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무한 확장하면서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백련사의 이야기를 구축하고 있다. 그 일례로 이 연꽃은 다시 1층에 마련된 노라 노 컬렉션의 벽지 무늬로 나타나고 있다. 전시장을 뒤덮은 연꽃무늬를 통해 전체적으로 이번 전시가 순환하고 있다는 상징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거울의 대칭구조를 동일한 벽면에 나타내면서 드러나는 순환과 중첩된다. 거울의 순환은 한 개인의 파편적 삶의 구성물을 통해 개인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면, 연꽃에 의한 순환은 한 개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또 다른 개인의 순환을 나타낸다. 이것은 이번 전시장 전체를 뒤덮으면서 (인간 보편적인) 삶의 계보학을 구축한다.



흩어진 퍼즐 조각 3 : 발굴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컬렉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진이라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조덕현의 전체 작업에서 사진을 정교하게 옮기는 작업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다. (확장시켜 이야기한다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조덕현의 작업은 전반적으로 사진 일반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업을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사진’으로 기억해야 했던 슬픔에서 시작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현재에는 부재하는 대상을 사진을 통해 재생해야만 하는 슬픔. 이것이 그의 근간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빛과 그늘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순간을 사각의 틀에 가두는 행위이다. 즉, 시간을 박제한다. 특히, 오래된 사진은 그곳에 필연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세월의 얼룩과 함께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소급한다.

조덕현은 사진을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사진 그 자체로 두지 않는다. 사진을 있는 그대로 정밀 묘사한 그의 작업은 흡사, 사진 자체와 유사할 수는 있으나 사진 그 자체는 아니다. 사진에 필연적으로 담겨 있는 빛과 그늘의 순간은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터치가 지나가 자리로 전이되면서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시간만을 담지 하는 사진의 체계를 넘어서 현재의 시간에 재생시킨다. 과거의 것을 과거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발굴프로젝트와도 연관이 있다. 특히 과거에는 별 볼일 없었던 것이 새로운 서사와 직교하면서 현재가 기술한 새로운 역사가 되는 과정을 고려한다면, 조덕현이 정밀하게 옮기는 과정은 단순히 역사를 재생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 하나하나를 발굴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사진은 시간을 과거로 이동시키는 수직적 연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파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진의 특성으로 수평적 연상을 들 수 있다. 수평적 연상은 파편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시간들의 인과관계, 상관관계를 설정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과거의 시간은 하나의 서사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 서사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 또 다른 파편이 완성된 서사에 개입한다면, 그 서사는 어떻게 변모할 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의 시간에서 만난 것은 단수로서 유일적 ‘그’가 아니라 많은 파편으로 존재하는 ‘그들’에서 ‘그’를 선택하여 기술한 것이다. 전시장 1층에는 노라 노의 파편적 사진들이 놓여 있다. 그는 단수로서 존재하며 전시장 초입에 복수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전시장 1층에서 다양한 거울 체계에 있다. 그 역시 복수였다. 그리고 그 틈에 알 수 없는 빈 혹은 암전의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은 당신의 몫

다시, 전시장 초입으로 돌아와 ‘그들’을 바라본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사실이 발견된다. 부재의 순간을 깨닫고 있는 나 역시 단수가 아닌 무한 반복되고 있는 복수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곳에서 부재하고 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그/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던 것일까? 이 질문에 유보적인 답변이 가능 할 것이다. 만났을 수도 있고,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조덕현이 만들어 놓은 퍼즐의 파편을 만지작거렸다는 사실이다. 만약 퍼즐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전시장 곳곳에 있는 빈 캔버스 혹은 암전의 캔버스를 아직 구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덕현이 제시한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퍼즐을 구체화 시켜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힌트는 대칭, 순환, 발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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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Butterfly Dreams, Mirrors and Mountains / Notes for Duck Hyun Cho: re-collection _ Pontus Kyander  
21   나비 꿈, 거울과 산 / 조 덕현을 위한 기록 : 리-컬렉션 _ 폰투스 키안더  
20   조덕현의 전시: 리콜렉션 re-colllection _ 신지영  
19   역사에서 기억까지 _ 이지윤  
18   The Scattered Puzzle Pieces _ Dae-Beom Lee  
  흩어진 퍼즐 조각 _ 이대범  
16   Re-collection : Walking down two women's paths _ Jiyoung Shin  
15   Cho Duck–Hyun _ Ann Landi  
14   조덕현 _ Ann Landi  
13   Ontmoeting: (Trans) fusion of Landscape Portraiture and History Painting by Use of a Symbolical Device in Cho Duck Hyun's Digital Photo-Images _ Inhee Iris Moon  
12   A moral proposal _ Patrick T. Murphy  
11   Two Mysteries Colliding _ Chtistopher Fre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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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ho Duck-Hyun – biographer of illusions _ Jan D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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